단 하나의 목표만 갖고 사는 사람
여기 단 하나의 목표만 갖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명이 아니라 무려 20명이나 되고, 평균 연봉은 100억 원에 달하죠.
이 사람들은 바로 ”포뮬러 원 드라이버“입니다. 평생의 소원이 그저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인 사람들이죠.
포뮬러 원(F1)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모터스포츠입니다.
\각 모터스포츠 시리즈 별 소셜미디어 팬 수 비교: 가장 오른쪽 흰색이 F1*
매년 페라리, 맥라렌, 애스턴 마틴 등 슈퍼카 제조사뿐만 메르세데스 벤츠, 알파 로메오, 알핀 같은 양산 차 제조사 그리고 다양한 10개 팀이 각각 2명의 드라이버와 함께 우승을 위해 경쟁합니다.
그리고 드라이버 챔피언은 모든 F1 드라이버의 꿈이자, 지구에서 운전을 가장 잘하는 이 20명만이 도전할 수 있는 특별한 목표입니다.
(이들의 평생 소원, 드라이버 챔피언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면, "평생 이어질 기분"을 먼저 읽고오세요!)
꿈의 무대에 올라선 늦깍이 데뷔생
네덜란드 출신의 95년생 닉 더프리스는 F1 챔피언을 노리는 수많은 드라이버 중 한 명이었으나, 오랫동안 운이 없었습니다.
F1 하위 리그인 F2의 2019 시즌 우승을 차지하고, 전기차 대회인 포뮬러 E 2020-21 시즌을 우승한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F1과는 인연이 유독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도운 것일까요? 2022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대타로 참가한 F1 데뷔전에서 9위를 하는 기염을 토하며 포인트를 따냈습니다. (쟁쟁한 20명의 F1 드라이버 중에 처음 F1 머신을 탄 닉이 9위를 한 것은 아주 대단한 일입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닉은, 2023년 레드불 레이싱의 2군 팀인 알파 타우리에 입단, 28세라는 나이로 F1에 늦깍이 데뷔를 하게 됐습니다.
빠르면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F1에 데뷔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죠.
하지만 모든 모터스포츠 드라이버들이 꿈꾸는 꿈의 무대인 F1에 데뷔하게 됐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상상도 하기 힘듭니다.
닉은 그의 공식 F1 레이스를 앞두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카트 시절 사진을 올리며 설레임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적을 못내면, 짤리죠.
It's very simple. If you're not performing, you're out.
아주 단순해요. 성적을 못내면, 짤리죠.
2021년과 2022년 F1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한 레드불 레이싱의 맥스 베스타펀이 한 말입니다.
(참고로 이분은 만 17세에 F1 데뷔하고 최연소 데뷔, 최연소 우승, 최연소 포디움 등 F1의 거의 모든 기록을 갱신했고 지금도 만들어 가는 중)
최정상 레이서들의 세계인 F1은 아주 냉정합니다. 시즌 중에도 성적이 부진하다면 언제든 팀에서 방출될 수 있습니다.
닉 더프리스는 스쿠데리아 알파 타우리 F1팀에서 10경기 동안 단 1포인트도 따내지 못했습니다.
2020년부터 알파타우리에서 달리고 있는 팀 메이트 유키 츠노다는 2023 시즌 2 포인트를 획득한 것과 대조되죠. 단 2점이라 생각하면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만...
매 그랑프리마다 1점 이상을 따는 레이서는 20명 중 절반뿐입니다. 포인트 피니시 자체가 아주 어려운 셈이죠. (F1은 1~10위까지만 각각 25, 18, 15, 12, 10, 8, 6, 4, 2, 1점을 부여합니다.)
유키는 23년 시즌 10경기 중 2경기에서 10위, 3경기에서 11위를 차지하며, 아쉽게도 포인트권에 들지 못한게 3경기나 됩니다. "포인트권에서 놀고있다"라고 표현해도 크게 어폐가 없는 성적이죠.
반면 닉은 대부분의 레이스에서 하위권에 머무르고, DNF(Did Not Finished: 완주 못 함)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저조한 퍼포먼스 때문에 닉이 짤릴 것이라는 다양한 루머가 있었고, 실제로 지난 7월 11일, 닉 더프리스는 전격 방출됐습니다.
그리고 레드불 출신의 다니엘 리카르도가 레드불 2군인 알파 타우리로 1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물론 10년 전 당시엔 팀 네임이 "토로 로쏘:이탈리아어로 붉은 소"였지만)
*리카르도도 퍼포먼스가 안 나와서 2022년 맥라렌에서 짤린 건 안비밀, 짤렸다는 사실을 애써 웃으며 전하는 리카드로쨔응(시트를 뺏긴 드라이버가 울먹거리는 것을 보세요!)
짤려도, 쫓겨나도 Life goes on
위에 울먹거리며 자신이 짤렸다는 사실을 알리는 다니엘 리카르도처럼, F1 시트를 뺐긴다는 것은 레이스 우승만 보고 평생을 사는 드라이버에게 사형선고와 같습니다.
앞으로 레이스 윈을 노릴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빼았기는 것이니까 말이죠.
닉 더프리스도 갑작스런 팀의 결정에 충격이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닉의 계약은 Multi year contract 였고, F1은 세계 최정상급 레이서들의 각축전으로 원체 경쟁하기가 어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알파타우리 처럼 경쟁력 있는 차를 가지고 있지 못한 팀은 더더욱 경쟁하기 어렵습니다.
닉은 아마 팀이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일은 벌어졌고, 닉은 시트를 잃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셈이죠.
이 블로그 작성 기준 14시간 전 닉이 위와 같은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알파 타우리에서 방출된 뒤로 처음 올리는 소셜미디어 포스팅입니다.
최근의 일들 이후, 최근 일로 인해 소셜 미디어에서 잠시 동안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꿈을 이루게 해준 기회를 준 Red Bull과 Scuderia AlphaTauri에게 감사드립니다. 물론, 저의 오랜 꿈이었던 F1 기회가 이렇게 이른 시기에 끝나버린 것은 슬프지만, 인생은 의미는 목적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정 그 자체이고, 때때로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선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하기도 합니다.
제가 살면서 누린 다양한 특권에 감사하며, 우리의 여정과 가족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 이것은 단지 또 다른 경험에 불과하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며 다음 장을 기대할 것입니다.
지난 주 동안 친절한 격려 메시지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지지를 느낄 수 있어 정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
닉은 잠시 소셜미디어를 멀리하고 휴식기를 가질 것으로 보입니다.
짤리고 쫓겨나는 레이서가 닉 혼자는 아닙니다.
F1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번은 들어봤을 이름인 “마이클 슈마허”의 아들로 데뷔 전부터 많은 기대를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믹 슈마허도 2021 시즌부터 수많은 경주차를 부셔먹다가 2022 시즌을 마지막으로 방출됐고, 2023년 시즌부터는 독일 F1 팀인 메르세데스에서 테스트드라이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20년 큰 스폰서를 물고 와서 시트를 확보한 것으로 “페이 드라이버”라는 놀림을 받기도 한 윌리엄스의 라티피 또한 저조한 성적으로 2022 시즌 후 방출됐습니다. 이후 라티피는 MBA로 진학해 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F1의 수많은 드라이버들이 시즌 중, 혹은 시즌 후에 방출 혹은 교체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곧 새로운 재능을 가진 드라이버들로 채워집니다. 물론 새롭게 채워진 드라이버의 시트도 실력이 없다면 보장되지 않고요.
이렇게 평생을 꿈꾸던 것을 잃어도, 삶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라티피처럼 다른 꿈을 찾아갈 수도 있고, 리카르도나 믹처럼 계속 본인이 사랑하는 F1에서 기회를 찾을 수도 있겠죠.
삶이 레몬을 준다면
“삶이 레몬을 준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는 격언을 많이 봤을 겁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이에 굴하지 말고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라는 말이죠.
하지만 중요한 건 삶이 레몬을 줬을 때,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삶이 레몬을 준다면, 레몬을 껍질 째 씹어먹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인데, 오글클 보영님이 쓴 “당신의 인생이 당신에게 신 레몬을 줄 때”라는 글을 읽고 나서입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늘 세상에 내던져지는 기분을 느낀다. 두렵고 떨리며 피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던져질 때마다 나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을 받아들여 살아남고 다스리며 소중한 것을 지킬 것이다.
이 기분은 내가 이 세상과 작별할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갑게 기꺼이 이 기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 When life gives you a lemon, you must eat the lemon - all of it including the skin."
달콤한 레모네이드 따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존나게 시고 먹는 게 힘들더라도 그냥 껍질째 레몬을 모두 씹어먹을 각오로 살아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레몬 자체를 씹어먹을 정도로 강한 의지로 삶을 개척해 나가라는 메시지 같았거든요.
맥라렌에서 쫓겨나서 울먹거리며 영상을 올리던 리카르도도, 아빠만큼 차를 못 탄다고 놀림 받던 믹도, 페이 드라이버라는 조롱을 받다 MBA로 떠난 라티피도 그리고 알파 타우리에서 가장 최근에 쫓겨난 닉도 자신만의 레몬을 존나 씹어먹길 바랍니다.
그리고 삶이 제게 레몬을 줬을 때, 저도 그 레몬을 껍질째 잘근잘근 씹어먹을 수 있길 바랍니다.
괜찮아. 존나 괜찮아.
어차피 너는 너 이상일 수 없고 그 이하일 수도 없잖아!
닉에게 심심한 안부의 말을 전하며.(너에게 닿기를...)
Dear Nyck,
If F1 gives you a lemon, you must eat the lemon, including the goddamn skin.
I hope to see you next season on another team in F1.
Sincerely,
Your genuine fan, Steven
Fin,